항상1004님과함께
2020. 1. 3. 08:22
|
▣사랑방 이야기(착한도둑)▣
|
| n/strong>
|
(착한 도둑-상)
좀도둑 천석을 제압한 의문의 선비 대궐 같은 집에 데려가 하는 말이…
추석 만월이 두둥실 중천에 떠올랐다. 봉분이 턱없이 납작한 무덤 앞에서 송편·감·대추를 단풍이 물든 떡갈잎 위에 놓고 열대여섯살쯤 된 초립동이 탁배기 한잔을 올렸다. 그런데 큰절을 한 후 일어설 줄 모르고 어깨를 들썩였다.
“사부님, 오늘 밤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알려주십시오. 저 혼자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일어설 줄 모르던 초립동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털썩 주저앉아 음복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탁배기 한 호리병을 비웠을 때 만월은 멀찌감치 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가을밤 공기는 서늘했다. 초립동은 빈 호리병과 제수 음식을 싸들고 산에서 내려와 다리 밑 움막집으로 들어갔다. 아홉살, 열한살 두 녀석은 곯아떨어져 도르릉 도르릉 코를 골았다. 그날 밤, 초립동은 사부를 기다렸지만 꿈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다리 밑 움막집엔 네명의 거지가 살다가 거지대장 영감님이 이승을 하직하자 이제 세명만 남게 되고 자연스럽게 초립동이 대장이 됐다. 죽은 영감님과 초립동은 거지이자 도둑이었다. 큰 도둑은 아니고 부잣집 부엌으로 잠입해 은수저와 주발, 쌀 몇됫박,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나 훔쳐 장물아비에게 헐값에 팔아 푼돈을 챙기는 좀도둑이었다. 영감님이 죽고 나자 도둑질을 한동안 손 놓고 있다가 이 진사네 딸이 혼인 날짜를 잡아놓고 장에서 혼숫감을 바리바리 사오는 걸 보고 초립동이 혼자서 만물이 잠든 사경 녘에 이 진사네 담을 넘었다. 컹컹컹, 삽살개떼가 달려오자 초립동은 마당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채 장독에 뛰어올라 감나무 가지를 잡고 담을 넘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동네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 숨이 넘어가려 할 때 개울에 머리를 박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는데 초립동은 기절을 했다. 누군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초립동의 뒷덜미를 잡아 챙긴 것이다. 그는 초립동 얼굴을 개울물에 처박았다 꺼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초립동이 두손을 모아 “한번만 사, 사, 살려주십시오” 하자 남정네는 “따라오너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고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초립동은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자석에 딸려가는 쇠못처럼 그를 따라갔다.
대처로 나오자 뿌옇게 동이 텄지만, 안개가 열발자국 앞도 분간 못하게 짙게 깔렸다. 초립동이 따닥따닥 이빨 부딪히도록 떨면서 따라가자 정체불명의 그 남정네는 장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날이 장날이라 꼭두새벽부터 주막은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마주앉아 초립동이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슬쩍 올려다봤다. 검은 옷에 검은 두건을 쓰고 염소수염을 기른 서른 남짓한 그에게서 선비 풍모가 풍겼다. 이 진사네 하인이거나 순라군이 아닌 게 틀림없어 초립동은 마음이 좀 놓였다. 국밥을 한그릇씩 먹고 나와 또다시 안갯속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솟을대문 앞에서 문고리를 두드리자 행랑아범이 나와 대문을 열었다. 대궐 같은 기와집 사랑채로 들어가 열두폭 병풍이 둘러쳐지고 비단보료가 놓인 상좌에 검은 선비가 앉았다. 초립동이 두손을 모으고 무안하게 서 있자 “마음 편히 앉아라”고 말하는 검은 선비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흘렀다. 초립동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 검은 선비 소맷자락에서 매 한마리가 나와 날개를 쫙 펼치더니 선비 어깨에 앉았다가 선비가 손짓하자 펄쩍 뛰어 횃대에 앉아 초립동을 쏘아봤다. 검은 선비가 장죽으로 재떨이를 세번 두드리자 병풍 뒤에서 잽싸게 생긴 새까만 개 한마리가 나와 검은 선비 옆에 앉았다. 똑똑 소리가 나더니 문을 열고 선녀 같은 하녀가 차 두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초립동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몰라 ‘내가 시방 도깨비한테 홀린 게 아닌가?’ 생각하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하얗게 물들이자 마음이 조금 놓인 초립동은 검은 선비를 자세히 올려다봤다. 검은 옷을 입어 더욱더 새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초립동이 또다시 놀랐다. “네 이름이 천석이라 했던가?” “네, 네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검은 선비는 목소리도 부드럽게 말했다. “저 보라매 해동청과 풍산개 행운이는 우리의 동료다.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선비님은 무얼 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묻고 싶은데 꾹 참았다. 검은 선비의 말에 초립동은 기절할 뻔했다.
“죽은 영감님과 천석이 너는 항상 내 사업을 망쳐놨어.”
(하편에서 계속)
(착한 도둑-하)
좀도둑 천석을 집에 데려온 선비, 자신을 ‘사부님’이라 부르라 하는데…
“저희가 나리의 사업을 망쳤다니요? 우리는 그런 적이 없는데….”
침묵이 무겁게 방 안에 깔렸다.
“앞으로 나를 나리라 부르지 말고 사부님이라 부르고 거처를 뒤꼍, 초당으로 옮겨라.”
초립동은 검은 선비의 말에 토를 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가 돌봐야 하는 두아이가 다리 밑에 살고 있는데 초당으로 데려와 함께 살아도 될….”
“안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초립동은 다리 밑으로 갔다. 거지 아이 두녀석이 얻어온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너희 둘은 여기서 살아라. 나는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자, 두녀석이 울상이 되었다.
이튿날 밤 초립동은 검은 선비와 검은 개, 검은 매와 함께 뒤뜰에서 훈련을 했다. 초립동도 몸이 가볍고 빨라 저잣거리에서 또래들과 싸워서 진 적이 없는데 검은 선비는 번개였다. 여덟 자 담을 가볍게 넘고 축지법을 쓰듯 여기저기 휙휙 날아다녔다. 손짓과 휘파람소리에 검은 개와 검은 매가 검은 선비 뜻대로 움직였다.
초립동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몰랐다. 검은 선비는 집에서 자는 날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초립동이 이 집에 온 지 한달여 만에 안방마님을 마주하게 됐다. 스무살이 채 안된 앳된 얼굴에 수심이 꽉 차 보였다. 마님이 보자기를 풀어 초립동에게 광목 조끼를 건넸다. 초립동이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자 손수 입혀주는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가을 햇살이 듬뿍 내려앉은 초당 툇마루에 앉아 안방마님이 이것저것 물어봐 초립동이 솔직하게 얘기하자 “살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을 이 길로 끌어들이다니…”라 말했다. 아직도 초립동은 이 길이 무엇인지 몰랐다. 며칠 후 초립동이 다리 밑으로 갔다. 두녀석이 조끼를 입고 있어 물었더니 젊고 예쁜 마님이 갖다주더라면서 떡도 얻어먹었다 했다. 초립동 가슴이 찡해졌다.
두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검은 선비는 초립동과 검은 개, 검은 매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삼십리 밖 동촌에 다다르자 이경이 되었다. 산을 등진 큰 기와집 뒤,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숨을 가다듬은 후 날아오르듯이 높은 소나무에 올라 집 안을 내려다봤다. 잔칫날을 앞뒀는지 집 안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 말소리도 들렸다. 삼경이 무르익자 집 안에 불빛도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검은 선비는 천석이를 담 앞에 바짝 세우더니 두발로 어깨를 밟고 집 안을 살피다가 나비처럼 사뿐히 담 안으로 내려앉았다. 뒷담 쪽문을 여니 천석이도 들어갔다. 검은 개는 뒤뜰 별당 툇마루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검은 매와 검은 선비는 안채로 잠입했다. 한참 후 비명소리에 천석이는 안채 들창 아래서 절구통을 딛고 방 안 동태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검은 선비가 안주인을 겁탈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그 집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검은 선비가 사랑방에서 강도질해온 귀금속을 펼쳐놓았다. 금비녀 세개, 금팔찌 두개, 비취옥노리개 하나, 금반지 다섯개…. 혼수준비를 하던 신부 측 혼례품을 몽땅 털어온 것이다. 신부 어머니를 겁탈해서 입막음까지 한 셈이다. 초립동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죽은 사부 영감님과 초립동이 사업을 항상 망쳐놨다’라는 말의 뜻도 그제야 알았다. 혼인날을 받아놓은 부잣집을 검은 선비가 주도면밀하게 노리고 있을 때 어설픈 좀도둑이 그 집에 들어가 주인의 경계심을 바짝 올려놓아 일을 망쳤다는 얘기다.
어떤 때는 혼수준비하는 집 삽살개가 달려들고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와 검은 개가 삽살개를 막아 싸우고 검은 매는 하인의 눈알을 발톱으로 쪼아 무사히 도망쳤다. 한번은 혼수준비를 하는 부잣집에 들어가기 전에 검은 선비가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더니 대통을 돌려 뺀 후 물부리를 물고 ‘후~’ 하고 불자 뒤뜰을 어슬렁거리던 개가 펄쩍 뛰더니 잠시 후 쓰러졌다. 그걸 보고 초립동은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해졌다. ‘사부님 영감님도 독화살을 맞고 즉사했지! 주인집에서 쏜 게 아니라 바로 검은 선비가!’
초립동이 이 집에 온 지도 삼년, 호시탐탐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저절로 해결됐다. 어느 봄날 밤,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와 오랜만에 안방을 찾은 검은 선비가 복상사했다. 폭풍우가 몰아친 후 구름 위에서 떨어질 때 안방마님이 독침으로 검은 선비의 귓속을 살짝 찔렀던 것이다. 열여덟 건장한 청년, 초립동이 그 집을 떠나려 하자 안방마님이 그를 잡았다.
|

하루 일과에 시작과 끝에는 항상 여유로운 센스로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풍요로움을 가져 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