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세월이가면」(노래가된 시) 아픈 이별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 이별 바로 뒤에는 미련이지만 그 미련 뒤에는 환멸이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흘러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버릴 때」 그 사람의 초롱한 눈매와 뜨거운 입술의 감촉은 다시 아련한 그리움으로 살아나때때로 가슴을 적신다.
박인희 세월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
시인 박인환
박인환(朴寅煥, 1926년 8월 15일 ~ 1956년 3월 20일)은 한국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자신만의 도시적인 비애와 인생파적인 고뇌를 그려내고 있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이진섭
나애심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참고자료
1.세월이가면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명동백작' 中 / 박인희
동영상 클릭 ----> http://blog.daum.net/bugsu/17950192
2.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0>'세월이 가면' 세월이 갈수록 더 사랑 받는 노래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12/h2008123003191384800.htm
3.MBC다큐 그때를 아십니까 제30화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자료출처 http://nongae.gsnu.ac.kr/~jcyoo/reread/tree.html
박인환의 초기시는 해방 후 외국군대의 진주와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좌익에 가까울 정도의 진보적인 색깔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박인환의 시는 전쟁과 살육을 용인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고뇌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다는 양심적 가책은 결국 전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우익 쪽으로 선회하게 한다. 이러한 입장은 박인환 뿐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
전후 박인환의 시는 극심한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주의적 양상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은 무너지고 전쟁에 나갔던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이 민족의 통일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도 아니다. 전쟁은 어느 편이건 패배의 상처만 남긴 채 막대한 인명의 손실과 천만에 가까운 이산가족과 더불어 끝나고 만 것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에 값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이러한 전쟁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은 당시 휴전회담 반대라는 거대한 민족적 분노로 그 좌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를 생각할 때 허무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단지 민족해방과 자유수호라는 명분으로 색칠해진 살육, 운명의 장난에 불과했을 뿐인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허무의식, 그리고 모멸적인 삶 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이다. 여기서 그의 의식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허무적 센티멘탈리즘에 빠져들게 된다.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자행된 무수한 살육과 파괴, 그것은 인간적인 의지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나약성을 말해줄 뿐이며 그것은 자신을 포함한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노리개가 된 인간 자체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얻은 것 없이 단순한 살육과 파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시인이 추구해왔던 인간적인 가치와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깊은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전쟁 전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그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박인환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처럼 보인다. 전쟁 기간 중의 비인간적 체험 때문에 다시는 미래를 꿈꿀 수 없고 과거에 대한 회상만이 가능한 것이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과거의 청춘의 추억만이 박인환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인환의 죽음 직전에 씌어진 것으로 이야기되는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 시에 드러나는 것은 인생에 대한 허무와 과거에 대한 회고적 센티멘탈리즘이다. 이들 시가 깊은 천착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박인환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의지의 부족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 역시 박인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고 전쟁을 마음 속에서 합리화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비극을 보게 된다.
<목마와 숙녀>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 형식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애도의 밑바닥에는 전후 박인환의 인생에 대한 허무와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박인환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감을 제시하고 그것을 전쟁으로 인한 사랑과 인생, 문학의 죽음이라는 우리 현실에 비유적으로 관련시키고 있다. 버어지니아 울프가 절망적인 현대적 상황 때문에 인간에 대한 모든 가치와 신뢰를 상실하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듯이 시인의 현실 역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절망적이며 이는 곧 전쟁으로 인한 가치상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단락은 버어지니아 울프의 삶의 지향과 절망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 이끌어간다. 각 구절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가치가 훼손된 절망적인 상황을 다시금 인식시킴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시인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 처량한 목마소리,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서로 어울려 하나의 등가체계를 형성하며 진지하게 살고자 했지만 페시미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인생을 버린 늙은 여류 작가와 같은 삶의 포기에 도달치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처량한 목마소리를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들어야 하며 동면을 거쳐 비로소 새로운 청춘을 찾은 뱀처럼 눈을 뜨고 인생의 쓰디쓴 술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은 인생의 통속성과 죽음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처량한 목마소리, 쓰러지는 술잔 소리와 대비되어 인생의 허무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대한 서러움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동시에 전후 박인환의 인생에 대한 절망감, 허무감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인생은 통속적인 것인데 자살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실제로 절망 속에서 끝내 자살로 삶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류작가와 우리 전후의 절망적인 삶이 대비되어 있는 것이다.
박인환은 시집 후기에서 현대를 불안과 위기의 시대로 파악하고 반인간, 반생명적인 현대문명의 산물들로부터 진정한 시민정신, 즉 시의 원시림을 추구하려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 시민정신이란 폭넓은 개념으로 제반 비인간적인 현대문명의 산물들과 대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크게 비인간적인 것과 대립되어 순수한 인간성, 인본주의의 추구와 신식민지적 음모와 대립적으로 민족의 주체적인 삶의 추구를 의미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인본주의적 입장은 현대의 모든 가치, 사상의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사상과 교리가 결함을 노출하고 위기를 드러내는 현대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본능과 체험 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대한 입장 역시 이러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이반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의 추종이나 현실과 유리된 복고적인 감상, 토속주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본능과 체험에 의지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현대문명의 여러 모순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인환의 시는 몇차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6.25 이전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의 순수한 생명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추구, 그리고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순수한 삶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추구는 문명적인, 비인간적인 것과 순수한 인간적 욕구나 생명의지, 반항 등의 대립을 통해 제시되며 민족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해방직후 외세의 진주로 인한 신식민지적 문화의 침투와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 정신의 대립을 통해 나타난다.
6.25 중의 그의 시는 주로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 대한 절망, 그리고 전쟁 상황 속에서의 실존적 선택의 문제가 중심이 되며 전후 박인환의 시는 살육과 파괴에 복종한 인간성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좌절과 허무감,그리고 센티멘탈리즘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생명적인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원시림, 즉 인간성의 탐구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박인환은 결코 현실과 무관한 딜레탕트도, 전형적인 속물주의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오히려 박인환의 시는 초기시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여주며 전쟁과 관련된 시들은 파괴와 살육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을 지키려는 한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절망, 그리고 비극적 선택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시 이데올로기 편향의 전쟁시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전후의 감상적 허무주의 역시 전쟁을 합리화할 수 없었던 50년대 가혹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소녀적인 감상으로 처리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한편 그의 시는 초기 시에서 후기시까지 전체 변화과정을 통해 초기의 진보적 경향으로부터 반공적인 이념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변화는 전쟁이 강요하는 비극적인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 사회의 분단 고착화 경향을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저료출처: 버지니아 울프 1882-1941
http://blog.daum.net/hunii70/7946177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로 시작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 등장한 버지니아 울프.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넣고 템즈강에 투신 자살하기까지 수 차례의 정신질환과 자살기도를 경험한 버지니어 울프. 동시에 버지니아는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어난 작품 세계를 일궈 놓은 선구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아래는 최애리 번역가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문학사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또,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전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생전에 이미 블룸즈베리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데다가, 비범한 성격과 용모,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결국 자살로 마감한 생애는 그녀를 하나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에게는 정신박약인 딸이, 줄리아에게는 2남1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2남2녀가 태어났으며 버지니아는 그 중 셋째였다. 그래서 그녀는 여덟 살부터 예순 살까지 열한 명의 식구와 일곱 명의 하인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자라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유복한 환경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녔고, 여자 아이들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가 열세 살 때 어머니 줄리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녀는 최초의 신경쇠약을 겪었다.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부재와 아내를 잃은 레슬리의 상심은 온 집안의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 위의 의붓언니 스텔라가 살림을 맡았지만 역시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는 불과 열여덟 살이던 바로 손위의 언니 바네사가 살림을 맡게 되었다. 레슬리는 점점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갔고, 두 의붓 오빠들 역시 자매에게는 견뎌내기 힘든 존재였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던 그 시절은 1904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그녀는 신경쇠약이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달랐던 형제자매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바네사는 동생들을 데리고 블룸즈버리 지역으로 이사했다. 가난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주로 사는 허름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비좁고 침침했던 옛집과는 달리 집안을 환하게 꾸몄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클라이브 벨, 색슨 시드니-터너, 리튼 스트래치, 메이나드 케인즈, 레너드 울프 등이 드나들었다. 어떤 규범이나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반항적인 정신들이 맞부딪치며 예술과 철학과 문학을 토론했고, 바네사와 버지니아는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에 동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친구의 소개로 <가디언> 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여 원고료를 벌기 시작했다.
1906년 사남매의 그리스 여행은 불행하게 끝났다. 여행에서 얻은 티푸스로 토비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고, 블룸즈버리 그룹은 계속 번창했지만 버지니아는 어느새 스물 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었다. 1912년 그녀는 결국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다.
토비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던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주었다. 병원에서는 악화시킬 뿐인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었고, 창작을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처음부터 성생활이 배제된 백지 결혼이었지만, 결혼이 반드시 성관계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09년이었다. 1913년 완성된 <출항>은 1915년에 발표되었고, 뒤이어 <밤과 낮>(1919) <제이콥의 방>(1922)등이 발표되면서 차츰 인정받기 시작했다. 재미 삼아 사들인 수동식 인쇄기로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 역시 차츰 궤도에 올랐고,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등으로 명성과 수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자기만의 방>(1929)을 쓰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어째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란 그토록 어려운가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명한 이 에세이는 출간 당시부터 이미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1960년대 말 이후로는 페미니즘의 지침서가 되다시피 하였다. "우리가 모두 일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울프 부부의 삶에는 점차 암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침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었으며, 시골집으로 대피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시의 불편과 고통은 버지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갔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다음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 내용입니다.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4.세월이 가면
http://nocutkorea.egloos.com/2054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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